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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문화재 이야기

영국 영국박물관 소장 백자 달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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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백자호, 白磁壺)는 높이가 보통 40㎝ 이상 되는 대형으로, 둥그런 몸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조선시대의 백자 항아리를 가리킵니다. 유백색(乳白色)의 희고 깨끗한 살결과 둥글둥글한 생김새가 마치 보름달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순백의 미와 자연스러운 균형감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 백자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백자 달항아리, 보물 제1437호 / 조선 17세기, 높이 41.0cm /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달항아리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약 1세기 동안 조선 유일의 왕실 관요(官窯)였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백자 가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18세기 전반 현재 경기도 광주 지역에 산포해 있던 340여 개소의 가마 가운데 금사리 가마에서 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큰 항아리는 성형(成型)에 어려움이 많아 한 번에 물레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후 두 부분을 이어 붙여 완성합니다. 또한 번조(燔造)도 매우 어려워, 가마 안에서 구워지는 동안 모양이 일그러져 완전한 원형을 이루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비대칭의 둥그스름한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넉넉한 느낌을 주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고 풍성하게 해 줍니다. 이 시기의 백자는 맑은 색깔과 형태를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도 달항아리는 단연 으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 백자 달항아리, 국보 제309호 / 조선 18세기, 높이 46.5cm / 한국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사진제공 문화재청

  • 백자호 / 조선 17세기, 높이 28.5cm / 일본 고려미술관 소장
    사진제공 高麗美術館

1931년 출판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의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攷)』에는 달항아리의 쓰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대항(大缸)이라 하는 커다랗고 둥근 모양의 항아리가 있다. 이 대항에는 백자에 철사(鐵砂)로 용(龍)이나 화초 등을 그려 넣은 것이 있고, 무늬가 없는 것도 많다. 이것은 게[蟹] 젓갈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현재 전하는 달항아리들에는 진한 갈색 얼룩이 남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금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원래는 우리 어머님들께서 음식을 담던 실용품이었던 것이죠.

달항아리는 국보와 보물을 포함해 국내외에 20여 점이 알려져 있으며,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 고려미술관 소장 달항아리는 설립자 정조문(1918~1989)에게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본 오사카(大阪)시립동양도자미술관의 달항아리는 절도범이 깨뜨린 파편 300여 개를 수년간의 노력 끝에 완벽히 복원한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영국 영국박물관 소장 달항아리도 소장자의 애정어린 이야기가 스며 있습니다.

백자 달항아리 / 조선 17~18세기, 높이 47cm / 영국 영국박물관 소장
사진제공 British Museum

짧은 아가리가 맵시 있게 꺾인 아래로, 목이 없이 곧장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벌어지다가 몸체 중앙의 접합부를 지나면서 다시 좁아져 아가리 지름과 비슷한 크기의 굽에 이릅니다. 몸통 중심부의 이어붙인 부분은 약간 오목하며, 완전한 좌우 대칭은 아니지만 약간 비틀리고 변형된 모습이 전체 조형에 장애가 되지 않고 오히려 변화와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조선 백자의 특징인 온화한 백색과 유려한 곡선, 넉넉하고 꾸밈없는 형태를 고루 갖춘 항아리입니다. 높이 47cm 가량으로 달항아리 중에서도 크고 시원시원하며 당당한 모습이 17세기 말~18세기 중엽 백자의 대표작이라 할 만합니다.

버나드 리치
Ida Kar 촬영, 1961
런던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사진제공 :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영국박물관 소장 달항아리는 본래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의 소장품이었습니다. 홍콩 태생의 영국인이었던 리치는 일본에서 도예에 입문했지만 중국과 조선의 도자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 민예운동의 창시자이자 조선 미술에 큰 애정을 갖고 있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도 평생 절친했던 친구 사이로, 야나기의 집에 가마를 설치하여 도자기를 제작하기도 했을 정도로 친교가 두터웠습니다.

  • 야나기 부부와 버나드 리치
    1920년, 서울

  • 루시 리에게 보낸 버나드 리치의 편지 / 1943년
    사진제공 British Museum

이미 1912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렸던 척식박람회에서 이왕가컬렉션의 조선 도자에 관심을 보였던 리치는 1920년 직접 조선을 방문해 이왕가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리치는 고려 청자의 아름다운 빛깔과 조선 백자의 고요한 선에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도자를 비교하여 ‘조선의 선, 중국의 형태, 일본의 색’이라 평하기도 했던 그는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을 조선 백자가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조선 백자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리치의 저작인 「도예가의 포트폴리오(A Potter’s Portfolio)」에는 그가 작품을 만들 때 참고했던 조선 도자가 실려 있기도 합니다.

리치는 1935년 경성(京城)에서 도예 작품 전시를 마친 뒤 조선 백자 여러 점을 수집하여 귀국합니다. 그 중에도 백자 달항아리에 대해서는 “나는 행복을 안고 간다.”는 말을 남겨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리치는 영국으로 가지고 갔던 달항아리를 그의 도예 수제자 루시 리(Lucie Rie, 1902~1995)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리치는 루시 리에게 편지를 보내 ‘친구의 집에 도자기가 있으니 잘 지켜 달라’고 당부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루시 리의 작업실을 방문한 리치는 달항아리가 있을 곳이 그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도자기를 선사합니다.

1995년에 리가 죽자 달항아리는 다시 리치의 부인에게로 돌아갔지만, 부인이 사망하면서 1998년 경매에 나오게 됩니다. 그 때까지 영국박물관에는 제대로 된 한국관이 없었고 이를 안타까워하던 한빛문화재단 한광호 이사장이 100만 파운드의 기부금을 낸 상태였습니다. 영국박물관은 이 기부금으로 달항아리에 응찰하였지만 다른 응찰자가 낙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외환 위기로 인해 환율이 급등하면서 원래의 낙찰자는 달항아리를 포기했고, 영국박물관이 가져가게 됩니다.

영국박물관 한국관 전경. 좌측 뒤로 달항아리가 보인다.
사진제공 LordHarris at English Wikipedia

이렇게 하여 리치가 안고 간 달항아리는 그의 모국 영국에서, 영국박물관 한국관의 대표 유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5년에는 한국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특별전 <백자 달항아리>를 위해 귀국, 다른 8점의 조선 달항아리들과 함께 전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역과 시대를 넘어 넉넉함과 포근함을 선사하는 달항아리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온기(溫氣)를 담은 메신저가 아닐까 합니다.

글 : 한성욱(민족문화유산연구원장)

참고문헌

  • 국립고궁박물관, 2005, 「백자 달항아리 :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특별전 기념 강연」, 국립고궁박물관.
  • 국립현대미술관, 2013, 「야나기 무네요시」, 국립현대미술관.
  • Portal Jane, Korea - art and archaeology, London : The British Museum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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